학문의 즐거움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방승양 옮김/김영사/초판 1992년(1판7쇄 1993년)
왜 사람은 고생해서 배우고, 지식을 얻으려고 하는가? 나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다. 배워 나가는 과정에서 지혜라고 하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이 지혜가 만들어지는 한, 배운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이 결코 손해만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일단 잊어버린 것을 필요에 의해 다시 한 번 꺼내려고 할 때, 전혀 배워 본 적도 없고 들어 본 경험도 없는 사람과는 달리, 최소한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고, 어느 정도 시간을 들이면 별 고생 없이 그것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혜에는 그런 측면이 있다. - 히로나카 헤이스케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이공계의 공부를 했던 사람이라면 더욱 이 책과 저자에 대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까닭은, 그러니까 천재들의 자서전보다 이 책이 깊은 여운을 남기는 까닭은 평범함에서 시작하지만 끈기와 노력 후에 얻게 된 눈부신 성취결과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차분히 읽어나가다 보면 수학의 노벨상이라는 필드상 수상 등의 이야기는 그렇게 살다보니 당연히 따라오는 부수적인 부분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사실 그러하다.
오늘 내가 이 책을 다시 펼친 까닭은 아마도 내 자신의 게으름을 질책하고 싶어서 였을 것이다. 히로나카 헤이스케 박사는 나를 부끄럽게도 하고 용기를 주기도 하고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 같기도 하다가 결국 그와 나 사이 차이점을 인정하게 되면 또 한없이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복합적인 느낌 속에서 다시 책을 펼쳐 든다.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났고 1950년 교토 대학에 입학하였다. 교토 대학을 선택한 이유는 쿄토라는 도시가 마음에 들었고 누나가 살고 있어서 하숙하기 좋았으며 무엇보다도 일본인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유가와 히데키 박사가 있는 학교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대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수학의 길을 걷기로 결심을 하는데 '수학이라는 학문 속에서 나 자신의 창조성이 어떤 형태로 발현될지 몰랐고 석사 과정에 들어간 후에도 그 계기를 잡지 못해 무척이나 애태웠다'고 쓰고 있다. 그는 논문과 자기 이론의 창조에 관련한 고민으로 논문을 써야 하나, 쓰지 말아야 하나를 계속 고민하다가 어떤 계기(책에선 길게 묘사되어 있지만 생략함)로 '뭐든지 상관없으니 하여간 논문을 쓰자'고 결심하고 석달에 걸쳐 첫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은 27살에 필드상을 받은 프랑스 수학자 세레(Serre)로부터 '당신의 논문은 인용한 참고문헌에 대부분 씌어진 것' 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혹평만 받았지만 역시 쓰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첫째로 참고문헌을 상세히 이해하지 못한 실수를 범하긴 했지만 덕분에 논문을 만드는 방법을 배웠고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관계될 만한 문헌을 독파하여 철저히 알아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때문이고, 둘째는 이 졸작의 논문을 통하여 하나의 발판을 만들 수 있었고 이 발판을 기점으로 다음 논문을 쓰면 그것은 첫번째 논문보다 확실히 좋은 것이 되기 때문이며, 세째로는 논문을 씀으로써 자기 나름대로 착상을 키우려는 창조의 자세를 실제 체험을 통하여 배우게 되는데 이것이 가장 가치있는 성과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첫번째 논문 뒤 완성 중이던 두번째 논문을 계기로 하버드 대학에 유학하게 된다. 그 뒤로는 지도교수 이야기, 영재 동료 이야기들이 등장했다가 컬럼비아 대학 교수가 되었을 때 있었던 일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꼈던 일들, 그리고 중간중간 주제 있는 사색적인 글들이 이어진다. 이런 사색을 통해 그가 던지는 화두를 함께 고민해 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겠다.
그 다음 장에는 '도전하는 정신'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요약하자면 '특이점 해소'라는 현대 수학의 난제에 흥미를 느끼고 이 문제가 해결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꿈을 가진 뒤로 그가 배우고 연구해 온 모든 것들이 특이점 해소를 항하여 수렴해 가고 그런 중에 연구와 창조하는 기쁨을 체험한 이야기이다. 특이점 해소 문제에 매력을 느낀 까닭은 책 첫머리에 나오는데 부처가 사는 세계와 사람이 사는 세계로 사영한 부분이 나에게는 퍽 인상적이었다. 또한 대략 여기까지 오다 보면 왜 이 책의 제목이 '학문의 즐거움'인가를 짐작하게 된다. 그렇지만 즐거움이 거저 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 이런 표현을 대신할 한 소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나는 눈앞에 나타난 문제를 처음에는 막연히 쳐다만 본다. 주변의 학자들이 그 문제에 맞붙는 모습도 그저 쳐다보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동안에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지, 혹은 어떤 문제에 몰두하면 좋은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문제의 윤곽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우선 그렇게 되는 데까지 상당한 시간을 소모한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창조를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마음 속에 있는 욕망를 발동시켜서 비약하려 하고 행운을 잡으려고 한다. 운(運)이라는 불연속적인 비약을 하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가 없다. 그리고 나서 문제에 몰두하기 시작하는데, 그때 자기 자신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항상 소심(素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수학자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발상이며 아이디어다. 그 아이디어는 문제의 입장에 서서 자기 자신과 문제가 혼연일체가 되어야 비로소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느긋하게 기다리고, 기회를 잡을 행운이 오면 나머지는 끈기이다. 나는 남보다 두 배의 시간을 들이는 것을 신조로 하고 있다. 그리고 끝까지 해내는 끈기를 의식적으로 키워 왔다. 끝까지 해내지 않으면 그 과정이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두뇌가 우수하더라도 업적을 쌓지 않으면 수학자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노력이란 말은 나에게는 남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인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2002.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