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젠베르크
A.헤르만 지음, 이필렬 옮김/미래사/초판 1991년(초판1쇄 1991년)
나는 조금도 자지 않았다. 하루의 삼분의 일은 양자역학을 계산했고, 삼분의 일은 바위를 탔고, 삼분의 일은 서동(西東) 시집(괴테의 Westostlicher Divan)의 시를 외웠다.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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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젠베르크의 전기문을 읽는 것은 드라마틱한 교향곡을 듣는 것과 같다. 평화롭고 조용하며 느린 악장은 하이젠베르크의 유년시절과 같다. 그는 피아노를 배우고 수학을 공부한다. 빠른 템포의 흥겨운 악장은 새로운 물리학에 몰두하는 그와 같다. 좀머펠트 교수는 그의 재능에 걸맞는 과제를 내어 주고 그는 계산을 거듭한다. 파울리와의 토론은 멍청이란 소리만 숱하게 듣지만 언제나 도움이 된다. 불안하고 격정적인 악장은 그가 겪은 전쟁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는 독일에 남고 많은 학자들은 독일을 떠나 망명한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는 듯 하지만 그것은 그의 유년시절과는 다르다. 그러나 그는 양자물리에 대한 철학적 사색을 계속할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 악장은 경건함 속에 끝을 맺는다.
    여담이긴 하지만 사진을 통해서 본 숱한 과학자들 중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보다 잘생긴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젊은 시절 하이젠베르크의 반짝이는 눈과 부드럽게 웃는 모습은 어린(?) 시절 내 마음을 콩닥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또한 이 책 표지엔 60이 넘은 하이젠베르크가 연필을 입에 대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해설에는 '물질의 통일 이론'에 대한 연구라고 되어 있음)이 담겨져 있어 철학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사진을 처음 대한 10여년전의 나나 지금의 나나 하이젠베르크가 여전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학자 1위에 올라 있는 까닭은, 웃고 있는 스무살의 하이젠베르크와 사색에 잠긴 철학적 과학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한데 뒤엉켜 있기 때문일 것이다. ^^
    2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얇은 책인 <하이젠베르크>는 하이젠베르크의 저서 '부분과 전체', '경계를 넘어서' 뿐만 아니라 토마스 쿤과의 인터뷰와 그리고 기타 여러 자료들을 바탕으로 씌어진 전기문이다. 앞서 음악에 비유했듯이 책은 그의 생애를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고 있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대학시절의 하이젠베르크이다. 현대물리학 교재를 펼쳐 보면 대부분 1920년대의 물리학에서 시작한다. 좀머펠트, 보어, 플랑크, 보른, 파울리, 아인슈타인. 또한 하이젠베르크와 그들 각각과의 만남과 뒷이야기들은 유머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여기에선 전쟁 중의 하이젠베르크를 인용한 후 글을 마치려고 한다. 자살해버린 오펜하이머보다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만 원자폭탄을 만들 가능성을 지닌 과학자로써의 고민이 드러나 있다.

   
하이젠베르크는 "히틀러의 손에 원자탄을 쥐어준다는 생각을 소름끼치는 것"으로 여겼다. 1933년 당시에 어려운 막다른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조언을 얻기 위해 라이프치히에서 베를린으로 막스 플랑크를 찾아갔던 것과 같이, 지금 그는 다시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문제에 관해서 그와 가까운 사람과 의논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지도적인 원자 물리학자 중의 하나인 보어에게 우리(폰 바이츠제커, 옌젠, 그리고 하이젠베르크)는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옌젠도 닐스 보어의 좋은 친구였는데 그도 우리가 보어와 인간적으로 의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독일에서 간단하게 그 일 전체에서 벗어나고, 그 다음에 누가 하든 그 일은 계속되겠지만 우리는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일 전체를 우리 수중에 두려고 노력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든지, 아니면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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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하이젠베르크는 1941년 9월에 "물리학자에게 전쟁중의 원자 문제에 관해서 연구할 도덕적 권리가 있는가"라는 물음을 가지고 코펜하겐으로 보어를 찾아갔다. 한스 옌젠이 표현했듯이 '독일 이론물리학의 대주교'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면죄를 받기 위해서 '교황' 닐스 보어에게 갔던 것이다. 자주 인용되는 이 말은 그러나 그릇 생각하게 만든다. 하이젠베르크는 면죄가 아니라 국제적 협력을 구했던 것이다.
    1941년 9월에 상호 이해를 위한 조짐은 좋지 않았다. 독일군이 1940년 5월에 덴마크를 점령한 이래 덴마크 국민은 연합군에 대해 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협력', 즉 독일인과의 협력은 범죄로 여겨졌으며 보어는 하이젠베르크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기도 전에 벌써 내부에서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에게도 내부의 벽이 있었다. 그는 독일인으로서 극히 은밀한 군사 계획에 참여하고 있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반역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나는 의논의 진행을, 내가 그것을 통해서 직접 생명의 위험에 처하게 되지 않는 방식으로 하려고 애썼다. 그것은 아마, 물리학자들이 전시에 우라늄 문제에 몰두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나의 물음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의 약간 초조한 반응에서 나타났듯이 보어는 물음의 의미를 즉시 이해했다. 내 기억에 의하면 그는 '당신(여기에서 보어는 전과 달리 Du가 아니라 Sie를 사용하고 있다-역주)은 정말 우라늄 분열이 무기 제조에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으로 대답했다. 나는 아마 '그것이 근본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기술적 투자를 필요로 하며, 우리는 그것이 이 전쟁에서 실현되지 않을 것을 희망할 수 있을 뿐입니다.'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보어는 나의 대답에 놀랐으며, 분명히 내가 그에게 독일이 원자탄 생산 과정에서 커다란 발전을 이룩했음을 알리려 한다고 믿었다."
    오늘날 그 대화를 가능한 한 다시 재구성해 보면, 무엇보다고 다음 두 가지 점이 하이젠베르크에 의해서 화제에 올랐음이 드러난다. 첫째로 그는 보어에게서 물리학자들이 그들의 과학을 전쟁에 봉사하는 데 제공해도 되는지 듣고 싶었다. "보어에게 물은 것은 아마 나의 잘못이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보어가 처한 상황에서 생각할 때, 보어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는가? 적국의 몇몇 친한 물리학자들에게 이제 조언을 한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아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보어가 독일의 핵물리학자들에게 "거부하고 원자탄을 만들지 말라!"고 조언했다면, 이로써 그는 미국에 있는 그의 친구들에게도 같은 뜻에서 영향을 미쳐야 할 의무를 지는 셈이었다. 보어는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연합군의 전쟁수행 노력에 장애가 되고 싶지 않았다. 히틀러의 진격을 끝내 저지하는 것이 보어게게도 첫째 목표였던 것이다.
    보어와의 의논에서 하이젠베르크에게 중요했던 두 번째 점은, 원자탄 제조에서는 "엄청난 기술적 투자가 필요하며, 따라서 이 실제의 상황이 물리학자들에게 어느 정도는 원자탄의 제조가 시도되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결정할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도 보어에게는-그가 독일과 미국의 핵물리학자들 사이의 정직한 중개인 역을 맡고자 했다면-연합국에 있는 그의 친구들과 제자들에게 원자탄 개발을 위한 연구를 하지 말라는 조언을 하는 결과가 되는 셈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나중에 미국의 계획을 멈추는 것이 보어에게는 불가능했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보어는 "놀랍게도 모든 나라에서 물리학자들의 전쟁 참여가 불가피하고 따라서 정당하다고 말했다. 보어는 분명히, 여기서 모든 민족의 물리학자들이 말하자면 그들의 정부에 대항해서 연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다음에) 나에게,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았고, 따라서 나의 질문을 우리 지식의 상태에 관한 간접적인 정보 이상으로 파악했다는 말도 했다."
    이 대화에서 하이젠베르크는 매우 불운했다. 전에 그는 코펜하겐 그룹의 많은 뛰어난 물리학자들 중에서 보어와 가장 가까웠다. 20년대에 두 사람이 '코펜하게 해석'까지 포함해서 현대 물리학을 공동으로 창조했을 때 그는 보어의 수제자였다.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은 가까운 서로 신뢰하는 친구였다. 전에는 섬세한 물리학적 철학적 사고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아주 빠르게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의사 소통은 분명히 불가능해진 것이다.
    절친한 친구이자 뛰어난 학자인 두 사람 사이의 실패로 끝난 대화는 나중에 다음과 같이 상징적으로 이해되었다. 즉 민족 사회주의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많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전에는 그토록 가깝던, 서로 공모했던 국제 물리학자 집단이 파괴되었다고. 물리학자들은 이제는 함께 일하지 않고 서로 대항해서 일했다.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우라늄 계획의 우두머리였으며, 보어는 덴마크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도망친 뒤에 미국의 원자 에너지 계획을 위해서 일했던 과학자들에게 조언을 했다.
(2002.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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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세렌디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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