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늦여름쯤.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인데 음악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고 했더니 소개팅 시켜 달라고 그랬다는 것이다. 하핫. 나야 거절할 까닭이 전혀 없지.
그래서 날짜와 시간을 정하였고 (그러고 보니 이 즈음에도 한가했던 것 같다. -_-;;) 그 날이 왔다.
퇴근시간 지나고 약속시간까지 시간을 죽이고 있는 중에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응급환자가 있어서 수술이 늦게 끝날 것 같고 밤 9시에나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무리하는 것 같아 날짜를 바꿀까도 했지만 결국 9시에 만나기로 했고 만났다.
친구와 그 소개팅남이 나란히 들어왔다.
생글거리는 친구와 앙상한 얼굴에 무테 안경을 쓰고 역시 생글거리는 남자였다.
무척 어려보이는 얼굴이었는데 내 친구 왈 다섯~여섯 연상이라고. 암튼.
처음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흐릿하고 곧이어 장소를 우리집 근처 beer bar로 옮겼는데 중간에 친구는 집에 가버리고 둘만 달랑 남았다.
재밌는 건 이 아저씨의 '물리에 대한 사랑(?)' 이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물리 공부를 강요당했다는 것이다.(아버지가 물리과 교수였다고 함.) 물리에 대해 정말 흥미가 있었던 건지 아님 내가 물리과 출신이라서 화제를 그렇게 바꾸었는지 어쨌는지 딱딱한 물리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음악 이야기, 재패니메이션 이야기, 인터넷 등의 주제로 바뀌어 갔던 것 같다.
지루한 이야기들이 아니었고 이런 이야기 하다 보니 어느새 자정이 되었는데, bar 주인이 와서 영업이 끝났으니 나가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이 아저씨가 나가다 말고는 그랜드 피아노 곁으로 가서 한번 치고 가겠다고 청했다.
bar 주인 허락하에 피아노 의자에 나란히 앉았는데 함께 칠만한 곡은 없고 (왜냐면 내 실력이 달려서..사실 아주 쉬운 곡을 함께 치긴 했다. 곧 끝냈지만. -_-;) 자신이 소팽의 곡을 쳐주겠다면서 야상곡 앞부분을 연주했다.
화려한 야상곡의 첫 소절이 울리고 나는 라이브로 듣는 첫 쇼팽이었기에 나름대로 감동을 받고 있었는데 얼마안가 한 소절에서 틀린 음을 짚고는 멈춰 버렸다. (다소 안타까운..)
역시 나중에 안 일이지만 지난 몇일간 병원에서 밤을 새어 몸이 완전히 녹초가 된 상태에다가 술에 본래 약한 사람이어서 맥주 몇잔에 약간 비실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빨리 집에 들어가야 할텐데 bar에서 나와도 도통 집에 갈 생각을 안하더니 편의점에 들르자고 그러는 것이다. 편의점에서도 맥주 한캔을 사는 아저씨. 그리고 500원짜리 즉석 복권 4장을 사서 두장씩 나눠 갖자고 한다.
"당첨되면 몇대 몇으로 나눌까요?"
늦어서 빨리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던 나는 시덥잖은 농담도 재미없고 어떻게 집에 보낼까 궁리만 하고 있다가 내가 다 갖겠다고 썰렁한 대답만 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띄엄띄엄한 기억.
택시를 잡아 주었는데도 안타고 기어코 우리집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와서 나는 인내심을 잃어 버렸던 것 같다. 그제서야 이 아저씨가 약간 취했다는 걸 감지했는데도 나는 그냥 집에 휙 들어와 버렸다. 다 큰 어른인데 알아서 잘 하겠지 하는 심정으로 말이다.
어쨌거나 간만에 한 소개팅 전말이 이러하다.
피곤한 몸에 자신의 몸 생각도 안하고, 늦게 나온 미안함에 피아노를 쳐주고 집까지 바래다 주던 매너 맨. 굳이 칭찬을 하자면 이렇지만 사실 내가 이 아저씨를 두고 하고 싶은 말은 이게 다가 아니다.
그 다음 만남이 있었던 것인데, 요건 다음에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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