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연구소 옆동네 토지개발공사 앞길을 지나는데, 나무마다 무슨 글자가 적힌 흰 종이가 펄럭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저게 뭘까 하고 가만히 보니 종이에는 '생일 축하해!'라고 쓰여있고 마침내 '혜숙아 사랑해!'라고 적힌 커다란 플래카드를 보고야 말았다.

'선영아 사랑해!'의 2탄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러기엔 인적이 너무나 드문 뒷길이고.. 추측컨데 저 카드의 주인공 혜숙씨는 토개공을 다니는 여성일 것이며 그의 애인이 나무마다 '생일 축하해!'를 걸어 놓은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거의 동시에 두 가지 생각이 스쳤는데 한가지는 용기있게 '사랑해'가 적힌 현수막을 걸 줄 아는 열정을 지닌 사람이 부럽다는 것이며, 두번째는 나는 저렇게 해주는 사람 없어도 별 불만없이 그럭저럭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요행감에도 불구하고 한가지 씁쓸한 생각이 들었으니 그것은 내가 저렇게 온 마음과 정성을 바칠 대상이 이 상에 존재하기는 할까 는 의문 때문이었다. 이것은 참 건방진 생각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참으로 간절한 생각이기도 하다.

부어도 부어도 채워지지 않는 술잔, 곁에 있어도 그리운 사람.. 어쩜 사랑은 이렇게 모순 투성이일지도 모르겠다. '혜숙아 사랑해!'를 플래카드로 만들어 나무에 걸고 너에 대한 내 사랑은 특별하다를 동네방네 광고하지 않아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사랑하며 사랑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은 받을 줄 안다. 그리고 사랑은 머무르지 않고 옮겨가는 것임을 알며 말하지 않아도 알아지는 것임을 안다.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 거짓임을 알며 사랑한다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의 사랑한단 한 마디가 천마디 사랑의 말보다 귀함을 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이성적인 생각에도 불구하고 불쑥불쑥 정신을 마비시키는 것 또한 사랑임을 안다. 영원할 것 같지만 변덕스럽고 한없이 온화할 것 같지만 한편으로 한없이 사나운 것이 또 사랑인 것이다.

사랑이 어떤 모습이고 어떤 모습으로 올 지 알 순 없지만, 이쯤에서 한가지 소망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사랑이 어디에서 어떻게 오고 그것이 어떤 색의 빛을 발할지 알 순 없을지언정 다만 그 사랑이 진심이게 하소서 하고 말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고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심이게 하소서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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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세렌디피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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