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TV에 '허영의 시장(Vanity Fair)' VOD가 있었다. 절반쯤 보다가 못보고 접었던 영화인데 발견하곤 좋아라 하며 후반부를 다 보았더랬다.
리즈 위더스푼이 1800년대 여인으로 등장하는데 이 글에서는 영화보다는 원작소설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새커리(Thackray)의 대표소설 허영의 시장. 영화를 보고 호기심에 원작소설을 구해 읽어보려고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검색을 했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 찾을 수 없다. 국내 번역본은 1994년에 나온 것이 마지막이며 아예 교보문고 DB에도 올라가 있지 않은 듯 했다. 현재로선 도서관을 뒤지거나 영문판을 구해 보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암튼.. 안타까움을 뒤로 하고, '허영의 시장'이라는 이 인상깊은 제목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다른 소설에서 왔다. 정독은 못했으나 대강은 알고 있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 이 소설에서 기인한 허영의 시장은 천국으로 들어가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할 장소 중 하나로 나온다. 허영의 시장에서 팔아대는 물건들을 사지 말고 통과해야 천국으로 갈 수 있다.
그때 나는 꿈속에서 그들이 황야를 막 벗어나자 곧 마을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 마을의 이름은 '무상함(Vanity)'이라고 했다. 그 마을에는 '허영의 시장(Vanity-Fair)'이라는 장이 서고 있었다. 그 장은 일년 내내 섰고, 허영의 시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 장이 계속 서고 있는 마을이 허영보다도 더 천박했고 또한 거기에서 사고 파는 모든 것이 허영이었기 때문이었다. 현자가 말한 격언대로 '무릇 장래의 일은 모두 헛되도다.'였다.
이 시장은 지금 새로이 세워진 것이 아니라 태고적부터 서 있었는데 그 내력은 이렇다.
약 5천 년쯤 전에도 지금의 이 가엾은 두 사람처럼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이 많이 있었다. 순례자들이 이 마을을 통해 난 길로 지나가는 것을 본 비엘지법, 아폴리온, 레기온이라는 세 악마는 자기 동료들과 함께 이 허영의 도시에 시장을 세워서 일년 내내 온갖 헛된 것들을 팔기로 계략을 세웠다. 그리하여 이 허영의 시장에서 그들은 상품으로 가옥, 토지, 직위, 신분, 명예, 승진, 귀족의 직함, 국가, 왕국, 욕망, 쾌락, 매춘부, 뚜쟁이, 아내, 남편, 자식들, 주인, 하인, 생명, 피, 영혼, 은, 금, 진주, 보석 등 온갖 즐거움을 거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시장에서는 언제든지 요술, 사기, 도박, 노름, 광대짓, 원숭이, 악당, 장난꾼 등 온갖 악한 것들도 볼 수 있었다. 또한 여기서는 강도, 살인자, 간통한 자, 거짓 증언 그리고 피처럼 붉은 얼굴을 한 자들을 그야말로 돈 한푼 안 들이고 볼 수 있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하늘나라로 가는 길은 이 도시를 통과해야만 하는데 바로 이 도시에 욕망의 시장이 서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시장 거리를 통과하지 않고 하늘나라로 가려는 자는 반드시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만 하게 되어 있었다.
새커리가 천로역정의 저 장소를 소설의 제목으로 택한 것은 레베카 때문일 것이다. 레베카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대부분이 자신만의 허영에 휩싸여 있다고 볼 수도 있는데 영화는 레베카만을 집중 조명하고 주변 인물들에 대해서는 설명이 너무 없어서 답답함을 느꼈다. 이런 답답함이 결국 책 찾아 삼만리를 하게 만들고 결국 원서를 사 보기로 결심을 굳히게 만든 것이다. (800페이지가 넘던데 잘 읽을 수 있을까나..)
어쨌거나 Vanity Fair는 많은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듯 하다. 유명한 헐리우드 연예인들을 표지모델로 삼는 잡지도 떠올려 지고, 연예인들을 생각하니 화려하고 사치스러우나 웬지 껍데기같은 이미지가 함께 떠오른다. 또 천로역정에서 따온 제목이다 보니 천로역정의 고난을 이겨가는 순례자가 유혹받고 고난받는 이미지가 떠올려 진다.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연상이 된다. 남북전쟁이 나고 스칼렛은 전쟁터에 홀로 남겨지는데 임신한데다 몸까지 허약한 멜라니를 돌봐줘야 했다. 황폐한 전쟁과 혼자서 싸워 이겨나가야 하는 스칼렛의 이미지가 레베카와 똑같다. 레베카도 전쟁터에서 홀로 싸워 나가야 했으니까.. 각 영화에서 이 두 개 장면은 매우 비슷. 자연스럽게 연상이 된다. 그런데 실제로 미첼은 소설 허영의 시장에 영감을 받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썼다고 하니 내가 받은 느낌이 우연한 것은 아니었던 듯 하다. 어쨌거나 이러한 이유로 속물적이지만 강하고 생명력있는 여인이 떠오른다. 또한 제목 자체가 주는 '허영'이라는 단어, 이 단어가 '무상함'과 '헛됨'을 포함하고 있는 듯 하지만, 이 단어, 허영이란 말 자체로도 돌아볼 것이 많은 듯 하다.
그러나 허영의 시장에서 내다 파는 상품 중엔 사고 싶은 것이 꽤나 많은 듯 하니, 아니 어쩌면 돈 없어서 못사고 있는 것들인 듯도 하니 어찌된 일인가.. 레베카가 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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