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잡기/생활의 재발견

팔자가 늘어졌구만

세렌디피티 2002. 12. 8. 00:00


내가 연구소에 오기 전에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겹친적은 없지만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언니가 있다. 조모언니. 결혼한다고 인사를 하러 와서 한번 본 적이 있는데 키는 자그마하고 얼굴을 이쁘장한 언니였다. 일류대를 나왔고 집은 부자라 한다. 다 들은 이야기다. 결혼한게 3년쯤 전이니까 그 언니 나이 33살 때. 남자는 미국 유학생이었는데 늦게 시작한 학위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고 이 언니는 결혼 직후 휴직도 아닌 퇴직을 하고 미국으로 갔다.
우리실 Home coming day에 우리 실을 거쳐간 사람들에게 연락해서 오라고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이 언니 이야기를 누군가 꺼냈다. 남편은 학위를 마쳤는데 아직 취직을 못한 상태라고 했고 조언니도 미국 건너가 1년은 적응한다고 쉬고, 1년은 랭귀지 스쿨 다니다가, MBA에 입학한지 이제 1년이라 아직 학생일거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난 속으로 '뭐..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강언니가 옆에서 한마디 던졌다.
"팔자가 늘어졌구만.."
푸하하. 집이 부자여서 남편도 자신도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일컫는 말.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공평하지 못하다고 생각드는 것일까?

공평에 관한 이야기를 쓰자니 또 이런 일이 생각난다.
우리 팀장님 이야기다. (내가 노는 물은 100여평 공간의 우리 사무실 뿐이기 때문에..)
우리 팀장님은 세상은 공평하다고 주장하신다. 돈 많은 정몽준도 불쌍한 사람이라고 주장하신다. 그 이유는 정몽준이 돈이 많아도 그 돈이 정몽준 돈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돈의 액수가 어느 정도 이상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이미 개인 돈이 아니라고. 그럴듯한 말이니 그렇다 치자.
그리고 나서 또 한가지 예를 드시길..
고등학교동창회에 나갔는데 (평준화 이전 잘나가던 고등학교였음) 반에서 1등, 2등 하던 놈들은 교수나 회사에서 팀장자리 정도 차지하고 있는데 꼴찌하던 놈들은 다들 사장님이 되어 돈 잘쓰고 잘 살고 있더라나. 그래서 세상은 공평하다고 주장하신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김박사는 그걸 반박하고 싶어한다. 요즘 초등학교 교과서에 박세리나 박찬호가 나온다고 한다. 공부 못해도 운동 잘하면 누구보다도 돈 잘 벌고 이름도 날릴 수 있다고 써있다더라. 그렇다면 인생의 성공이 곧 돈이냐? 무슨 교과서가 그 모양이냐고 따진다.
그 말에 아무도 적절한 답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그건 과도기의 일부인 것 같다고. 과거에는 공부가 최고인줄 알았다. 공부 잘해서 법관이 되는 게 최고인줄 알았다, 그래서 공부 잘하는게 최고 미덕이었는데 지금은 공부 대신 다양성에 눈 뜨기 시작했다고. 골프건 야구건 혹은 그 밖의 다른 분야건 자기가 남들보다 뛰어나기만 하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다양성 말이다.
다만 그 정점을 '돈'으로 평가하려 하고 행복이 성적순은 아니지만 돈순이 되는 걸 인정하게 되어버린 과도기라고. 어쩜 이 시기가 지나 인생과 행복을 물질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 가늠해볼 수도 있겠지만..

대강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끝이 났지만 물질적 풍족함이 행복을 재는 1순위가 오래도록 계속 되리라는 것에는 의심이 여지가 없었다. 나조차도 내가 얼마나 돈을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고 싶은 물건에 욕심이 나고,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잘 인식하고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