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렌디피티 2002. 9. 16. 00:00


뭐랄까.. 굉장히 안 좋은 습관 중의 하나인데 가끔 나는 달과 6펜스의 주인공을 떠올리며 부러워 하곤 한다.
달과 6펜스. 차라리 그냥 고갱을 이야기 하는 것이 낫겠다.
고갱은 평범한 가장이었다. 그림에 관심이 있었지만 화가가 되지는 않았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증권중개인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도 많았다. 다섯이었나.. 그러다가 그의 나이 서른 다섯에 전업으로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한다. 또한 그는 심지어 타히티로 떠나버리기까지 한다.

달과 6펜스는 이런 고갱의 삶을 모델로 조금 더 처절한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주인공의 아들은 대놓고 아버지를 비난한다. 가장의 의무를 져버린 아버지. 미운 아버지. (이 부분에선 어쩐지 출가한 부처님 생각도 난다. 부처님도 부인과 아들 다 버리고 출가해버리지 않았던가..)

고갱을 이야기할 때, 혹은 달과 6펜스를 이야기할 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핵심은 이것이다.
평범하고 모범적인 가장의 중년 나이, 그리고 그 나이에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가정을 버리고 자신의 길을 걷는 것. (여기서 고갱과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가 화가로써 명성을 얻고 성공했다는 것은 두번째 문제다.)
따라서 내가 부러워 하는 것은 '재능'과 '용기'이다. (가정을 버려야만 '재능'을 발휘하는가 하는 것은 나도 모르겠다. 사실 세상엔 둘 다 가진 사람이 많으니까..)
하지만 고갱의 상황에선 다 버려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칼로 베어버리듯 그의 인연을 다 끊어버리고 멀리 타히티로 떠나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의 그림은 노력의 결과물이다.

짐작컨데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리라 생각하지만...
나 역시 가끔은 달을 잡으러 떠나버리고 싶다. 도망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한다.
하지만 도망치거나 떠나지 않는 것은 순전히 오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 그래서 떠나버렸을 때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오기 때문이다.

현재까지의 결론은 이렇다.
나는 고갱과 스트릭랜드가 부럽고 나 또한 그들처럼 되고 싶지만 그러기에 나는 현재에도 충실하지 못하다는 죄책감이 있다는 것.
죄책감을 떨칠 수 있을 때까지는 아마 아무것도 못하리라는 두려움과 자신감의 결여라는 또 다른 문제.. 뭐 그런거다. 좀 더 편안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