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렌디피티 2002. 7. 2. 23:37

내일 오전 08시 15분 비행기를 타야하므로 회사에 6시 40분에 모이기로 했다. 평소에도 아침 일찍 못일어나는 습관이라서 내일은 무리를 해야 한다. 게다가 실장이 차를 놓고 간다고 픽업해달랜다. 그래서 더 일찍 나가야 한다. 이래저래 맘에 안든다. -_-;; 하긴 실장도 내 차 얻어타고 싶겠나.. 아쉬운 대로 구기고 타는 거지. 사실은 그래서 더 맘에 안든다.

잉. 잠시 이야기가 빗나갔다. 소개팅 야그 할랜다. (흑. 일찍 자야 일찍 일어나는데 말 많아지는 밤이다.)

지난 토요일, 띠리링 전화벨이 울렸다. 소개팅 하기로 한 男이다. 일주일 전쯤 만나기로 했다가 축구 봐야 한다고 약속을 한번 미뤘었는데 축구는 잘 보셨느냐 뭐 이런 전화다. 월드컵 경기장 가서 응원하며 볼 거라 그랬기 때문에. 근데 실은 월드컵 경기장 안갔다. 일부러 거짓말 한 건 아니고 사정상 못가게 된 거였다. 그래서 '실은 못갔어요' 했더니 '그럴 수가 있느냐, 약속도 미루더니..' blah blah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너무나 솔직한 내 성격을 원망하면서 '죄송하다' blah blah 수습하고 있는데 당장 내려오겠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그 때 시간이 토욜 오전 11시쯤. 뭐, 토욜 오후 할 일도 없고 '그러시지요' 했는데 마침 그 날은 한국-터키전 축구 경기가 있는 날. 고속도로가 꽉 막힐 것 같은 생각이 퍼뜩 들어 '저 그런데..' blah blah 했더니 자기는 차 몰고 드라이브 하는게 취미고 길 막히는 것도 즐기는 사람이라나.. 하핫. 웃기지 않는가. 진담인지 농담인지를 떠나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야?)

에구.. 사설이 길어진다. 각설하고 결론으로 가보자.
암튼 그 아저씨 오후 8시 넘어서 대전에 왔다. 예상대로 고속도로는 체증이 심했던 모양이지만 그 아저씨는 목소리도 얼굴도 밝았다. (그렇다고 내 맘에 들었단 소린 아니다. 내가 아직도 정신 못차리고 한없이 눈만 높기 때문일 수도 있고 울 엄마 말대로 그럼 넌 대체 어떤 놈(?)이 맘에 드냐 일 수도 있다.)

암튼간에 만났고 간단히 인사한 후에 아무 말없이 축구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푸하하. 때마침 약속 장소엔 커다란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고 붉은 옷 입은 손님들이 대~한민국! 짝짝짝 짝 짝!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잘 안풀리는 한국-터키전을 보느라 거의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다. 그 남자가 첫 눈에 맘에 들었다면 이 모든 상황이 바뀌었을지도 모르지만 암튼 난 축구에 더 관심이 갔다.

그리고 마침내 3대2란 스코어로 한국이 지고 나서야 우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남자 혼자 자기 이야기만 한시간 넘게 떠들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혼자 말 많은 남자는 첨 봤다. 얼굴만 보면 차갑게 생겨 가지고 많은 말 할 것 같지 않은데, 전화 통화 두어번 하면서 목소리만 들었을 때만 해도 말은 잘 한다고 생각했지만 수다스러운 정도는 아니었었던 것이다. 모대학 전임강사라니까, 강의 하니까, 말을 잘한다 뭐 이렇게 생각하고 이해해보려했지만 난 이미 삐딱한 생각에 접어들고 있었다.

암튼 그는 자기는 외국에 한번도 나가 본 적이 없는데 그 결정적인 이유가 영어를 못해서라고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헉, 누가 뭐랬나. 암튼 깜짝 놀랐다.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길 털어놓는 것도 그렇고 저렇게 말을 잘 하는데 영어를 못한다는게 믿어지지가 않아서.. -_-;; 고등학교 때 영어와 국어 점수를 합해야 수학 점수가 될 정도로 언어영역에 약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결정적으로 날 황당하게 한 것은 울 회사 입사시험을 치룬 적이 있었는데 영어 땜에 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가만 들어보니 나랑 한날 한시에 한 장소에서 영어 시험을 치룬 것이었다. 난 그 당시 영어시험을 생각보다 쉬웠다 정도로 기억하고 있는데, 이 아저씨는 그 때 이런 저런 문제가 나왔는데 너무 어려워서 아직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푸힛. 어쩌면 그 아저씨와 나는 한번쯤 스쳐 지나갔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가 합격했다면 입사동기가 되었을 거고 이렇게 소개팅이랍시고 만나서 앉아 있지도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백지 한장의 영어 차이가 서로의 길을 갈랐고 우연찮게 만나서 서로 표정관리 하며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 뒤로 소식이 없으니 아마 이 남자도 내가 맘에 안들었던 모양. ㅋㅋ)

암튼.. 나는 그가 그 뒤에 얻은 첫 직장을 3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나온 사연까지 듣고 나서 '넘 늦었는데..' 라고 웅얼거릴 수 있었다. 3개월 만에 사표 낸 이야기도 재밌는데 이건 담에 하도록 한다. (semiko, 잼없으면 말해줘. 나 그만 푼수(?) 떨게..)

사실 넘 늦은건 나다. 지금 자야 내일 5시 반에 일어나서 씻고 실장 픽업하러 가야 할 것 아닌감. 한숨~